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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관(효창공원)

소불 笑佛 2019. 2. 8. 23:43

백범 김구 연표

1876.1세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출생하다(8.29),

(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아명은 창암(昌巖)

1878. 3세 천연두를 앓다.


1880. 5세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2 . 7세 해주 본향 텃골로 다시 이사하다.


1884. 9세 조부상을당하다. 한글과 한문을 배우다.



1887. 12세 한학을 배우다.


1889. 14세 [통감], [사략] 병서를 읽다.

1890 . 15세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당시]. [대학]을 배우는한편 과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다.

1892. 17세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임진경과에 응시하고자 해주로 갔으나,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과장을 보고 실망하여 돌아오다.

             풍수와 관상 공부에 몰두하다.

1893. 18세 동학교도 오응선의 종지를 듣고 동학에 입도, 포교에 힘을 기울이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치다.

1894. 19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 접주라는 첩지를 받고 의암 손병희를 만나다.

          동학교도들과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다.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다.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의려소로 가서 은거하다.

1895. 20세 진사 안태훈의 집에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훈도를 받다. 김형진과 함께 만주를 시찰하고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강계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다.

1896. 21세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다(2월).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하였다는 포고문을 길거리에 붙이고 귀가하다.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1897. 22세 해주감옥에서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다.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사 명령이 내려지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감하지 못하다.

1898. 23세 탈옥하다(3월),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다(법명 원종).

1899. 24세 마곡사를 떠나 해주 수양산 신광사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기거하다.

               평양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어 지내다가 환속하여 귀향하다.

1900. 25세 강화에서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지내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1901. 26세 부친상을 당하다(2월) 삼촌 김준영을 도와 집에서 잠시 농사를 짓다.

1903. 28세 약혼녀 여옥이 죽다. 기독교에 입교하고,

           장연읍 사직동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화 선전과 애국, 애족사상을 고취하다.

             도산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를 만나 약혼하였으나 파혼하다.

1904. 29세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하다.

1905. 30세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진남포 의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이준 이동녕 등과 을사보호 조약의 철회를 상소하다.

             황해도로 돌아가 서명의숙 교원이 되다.

1906. 31세 해서교육총회 학무위원이 되어 학교설립을 적극 추진하다.

1907. 32세 장녀 화경 출생하다.

1908. 33세 안창호 등 애국지사 lO4명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참여하다.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우다.

1909. 34세 황해도를 순회하며 신교육 운동(향산학교 교원)과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배일운동을 전개하다.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다.

            재령 보강 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열중하였으며,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과 노백린을 만나다.

1910. 35세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다. 이 회의에서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하다.(11월)

1911. 36세 안명근사건(독립자금 모금)으로 체포되다(1월). 서울로 압송되어 흑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징역 17년을 언도받은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다.

1912. 37세 대사면으로 8년 감형. 일본 왕 명치 처의 사망으로 5년 감형되다.

1913. 38세 일제의 국적에서 이탈하려는 의도로 옥중에서 이름의 구(龜)자를 구(九)로 바꾸다.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하자는 뜻에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하다.

1914. 39세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어 매일 중노동에 동원되다.
            장녀 화경 죽다. 가출옥으로 석방되다(7월)

1915. 40세 동산평 농감을 맡다. 소학교를 개설하여 교원 생활을 하다.

1917. 42세 딸 은경이 죽다.

1918. 43세 맏아들 인(仁) 태어나다.(11월)

1919. 44세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다.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내무총장-이동녕, 경무국장-김구)


1920. 45세 부인 최준례 여사가 맏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다.

1922. 47세 어머니가 상해로 오다. 상해에서 둘째 아들 신(信)이 태어나다.

1923. 48세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취임하다.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대회 해산(6월)


1924. 49세 부인 최준례 사망하다.

1926. 51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다.

1927. 52세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으로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춰임하다.

1928. 53세 자서전[백범일지]를 쓰기 시작하다.

1929. 54세 [백범일지]탈고, 상해 교민단장이 되다.

1930. 55세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선되다.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다.

1931. 56세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독립투사를 양성하다.

1932. 57세 도쿄에 이봉창의사를 보내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하다.(1월)
          윤봉길의사에게 폭탄을 주어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하다.

          (4월)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하다. 조소앙등과 일경피해 가흥으로이주하다(5월)

1933 . 58세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하다. 남경에서 장개석주석을 만나 하남성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다(5월)

1935. 60세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하다(이사장 김구)

1937. 62세 7월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강소성 진강으로 옮겼다가 다시 장사로 옮기다.

           한국광복운동 단체연합(일명 광복진선)을 결성하다.

1938. 63세 남목청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통합회의 석상에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다(5월)

1939. 64세 임시정부 중경으로 옮기다.어머니 곽낙원 여사 사망하다.(4월)

1940. 65세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되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다.

1941. 66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다.

1942. 67세 임시정부와 중국 미국 영국 소련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다.
          간디에 '일본의 감언이설에 속지 마시오' 내용의 전보 보내다(8월)

1943. 68세 미국 O.S.S와 합작으로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하다.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연설하다.(3.11)

           장개석과 회견갖다(7.26) 임시정부 주석직을 사직하고(8.3l) 다시 복직 집무시작하다.(9.21)

1944. 69세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다.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다.

1945. 70세 맏아들 인이 사망하다(28세) 8월 15일 저녁에 성서성에서 조국해방의 소식을 듣다.

         11월 5일 중경을 떠나 개인자격으로 환국(11.23)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의 포부와 방책'을 밝히다(11.26)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돈암장서 회견을 갖다(12.1)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을 접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3천만에게 고함' 방송하다(12.27 엄항섭 대독)

1946. 71세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다(2.1)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총리에 취임하다.(2.14)
         브라운 군정장관과 회동, 임정에 정권 이양 요청하다(3.5)

        우익합당관련 이승만과 함께 '어떤 정당에도 불참' 선언하다(4.9) 민정시찰에 나서 인천의 각 공장 시찰하다(4.14,15)
          윤봉길 추도식 김규식등과 함깨 참석하다(4.29) 심장병으로 용산 제1병원에 입원하다(5.1)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 일본에서 찾아 효창원에 봉안하다.(6.30)

        대한독립청년단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되다. 총재에 이승만(9.12)

        하지중장과 요담하고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10.13)

1947. 72세 [나의 소원]을 발표하다. 우익반탁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을 맡다(1.26)
      2.8성명 '3천만동포에게 고함' 발표하다(2.8)

     한독당 간부회담서 한독. 한민 합당 제의하다(2.26)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소하다(3.20)

    이승만과 함께 '공위협의에 참가보류' 성명 발표하다(5.22)

     이승만과 함께 '공위참가는 각자의사에 따르기로 공동성명 발표하다(6.5)
    서재필 환영회 준비위원 맡다(6.24) 여운형 암살 관련 담화 발표하다(7.22)

     비상국민회의 43차 임시회의서 부주석 유임되다(9.21)

    26청년단체 통합, 대동청년단 결성, 부총재 춰임하다(9.21)

     '정부수립 이승만과 동일 단정수립 반대' 담화 발표하다(12.1)

1948. 73세 유엔한위, 김구등 조선인 지도자와 협의 개시하다(1.26)

     '미소양군 철수후에 자유선거 실시가능' 담화 발표하다(1.27) 

     한위 협의 관련 이승만, 김규식, 조소앙 등과 협의하다(1.28)

     유엔 한위 협의후 '철병후 선거실시' 의견서 제출하다(1.30)

     김규식과 함께 유엔한위에 남북회담 소집을 요청하다(2.6) 

    민의,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방안에 대한 담화 발표하다(2.8) 

    김구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하다(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하다(2.25)

    이북애국단체연합, 재남이북인대회서 고문으로 추대되다(3.10)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항구, 홍명희등과 총선거 불참 성명 발표하다(3.12)

     남북협상 관련 담화 발표하다(3.26)

     김구, 김규식 평양회담 참가 성명서 발표하다(4.1)

     남북협상 출발전 성명 '우리 지표는 통일뿐' 성명발표후 38선 넘어 평양도착하다(4.20)
    김일성등 15대표와 구체적 협상원칙 토의하다(4.30)

    김규식과 귀경, 남북협상결과 공동성명 발표하다(5.5) 

    소련군 철군관련 '영토내 외국군 철수' 담화발표하다(6.14)

    기자회견 통해 북조선서 2차 남북회담 제의하다(7.10)

    '단독정부에 불참' 담화 발표하다(7.19)

   '반탁과 철군은 동일'하다는 주장담은 담화 발표하다(10.19)

1949 . 74세 한독중집서 연설에서 '서울시 통일위한 남북협상 희망한다' 고 밝히다(1.16)

     성금을 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우다(1.29)

     '미소 철군협의는 평화통일의 진전' 담화 발표하다(4.19)

     마포 염리동에 창암공민교 개교하다(5.17)

     경교장서 안두희에게 피습받아 절명하다(6.26) 

    영결식 효창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지다(7.5)

     경교장 반환후 김신 충정로 금화장으로 이사하다(8.26)

    건국실천원양성소 해산하다(8.23)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대한민국장이 추서되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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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도





기념관 내부에서 바라본

백범김구 묘역



충칭 임시정부청사




1948. 4. 19

삼팔선에선 김구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애쓰던

백범 김구는

1949. 6. 26

경교장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향년 74세.

(1876 ~1949).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애쓰던

백범 김구는

1949. 6. 26

경교장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향년 74세.

(1876 ~1949).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