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제52주년 율곡제에 즈음하여

소불 笑佛 2013. 10. 27. 03:12

오죽헌과  이율곡선생은

강릉사람들의 자랑이고  배달민족의  보배이다.

 

우리들은 율곡선생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래서 52주년 율곡제에 즈음하여

여기에 약간의 자료들을 모아 보았다.

 

오죽헌이란?

 

 

 

자경문

 

안채, 바깥채 

 

 

어제각

 

문성사

어제각이 있던 자리에 문성사를 건립 하였다.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율곡선생의 영정

김은호 화백이 종이에 채색으로 그린 공식 영정 (149.5cm  X  87.6cm),  강릉시립박물관 소장.

 

5000원권 화폐에 도안된 영정.  

 

율곡선생 오죽헌 동상

율곡선생 동상은 사직공원에 1960년대에 건립되었고, 최근에 오죽헌에 세워졌으며,

파주 자운서원에도 건립준비 중이다. 

 

 

율곡선생은 강릉 북평촌 오죽헌에서 얼마나 살았나?

6세에 파주에 있는 본가로 갔다고 되어 있으니,

만 5년정도 오죽헌 외가에서 자라며,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로 부터 훈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이때 어린 시절을 우리들처럼 경포의 자연에서 정기를 받고 자랐을 것이다.

 

 

율곡선생이 잉태된 곳이 따로 있다.

 

 

 

 

 

 

 

 

율곡은 어디서 성장했나?

율곡은 6세에 파주 율곡리 본가에 와서 본격적인 수학에 전념하여,

13세에 진사초시 장원에 급제하고,

이어서 9번의 장원급제를 했다.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고,

23세에 이황을 찾아가 문답을 하였으며,

29세에 첫 벼슬길에 오르는데,

율곡의 29세까지는 오로지 공부하며 저술하고, 수신하는 기간이었다.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선생 유적지

부모의 생가터이며, 유년시절 공부하던곳이고 말년에는 낙향하여 후학을 지도하던 곳이다.  

 

 

 유적지 전체 조성도

 

 

한양 수진방 절골 집

벼슬길에 있을때는 한양 수진방 절골에서(지금 수송동-청진동) 살았는데,

이집은 아들이 없는 사임당의 친정 어머니가 율곡에게 외가의 제사를 받들라며 물려준 집이었다.

 

자운서원

벼슬하던중 간간이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 하였는데,

1584년 율곡사후 1615년 후진들이 선생의 학풍을 받들어 사립학교격인 서원을 설립하였고,

1650년 효종 원년에 자운이라는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이 되었다.

이때는 국립교육기관인 향교보다 서원이 융성하였고, 특히 임금이 액자를 내려주는 사액서원은 인기가 대단했다. 

 

자운서원 전도

 

  

자운서원의 규모는 오죽헌에 버금갈 정도로 넓고 크다.

 

 

 

자운서원에도 문성사를 짓고,

 

이곳에 율곡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덕수이씨 종친회에서는 봄,가을 제사 (율곡선생 불천지위재례,  율곡대상제) 를 지내고,

 

파주시에서는 매년 율곡문화제를 지내고 있으며, 금년이 26회로 지난 10월12-13 일까지 진행하였다. 

 

 

율곡 이이 신도비 

 

가족묘원

자운산 기슭에는 가족묘원이 있는데,

율곡선생 내외분, 부모님, 형제, 아들까지 총 14기의 묘소가 있다.

 

문성공 율곡선생 지묘 -- 묘비

 

정면

 

 옆모습

 

뒷모습

 

묘앞의 망주석과 문인석

 

율곡의 아버지 어머니 합장묘.--뒤로 입신공명한 큰아들과 맨위에 율곡의 묘소가 있다.

 

화석정

파평면 율곡리에 있다.  율곡의 호는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신 사임당

 신사임당상은 강릉시 저동 97번지 경포대에서 사임당로 준공으로 2010년 12월 22일 현위치 사임당공원으로 이전.

 

 

 

오죽헌 경내 신사임당 상

 

 

사직공원내에 있는 율곡 사임당 동상

율곡선생과 사임당의 동상은 서울 종로구 사직단옆 사직공원에 있다.

이것은 1960 년대에 세웠는데, 이곳에 건립한 배경은 파악이 안된다.

 

 

 

 

사직단은  임금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기간이 되는 시설이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를 설치하고,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종묘사직은 국가 정체성의 근간이 되는 시설인데,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일본놈들이 시설을 훼손하고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곳에 두분의 동상이 서게 된 동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