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마을에 다녀 왔습니다.--3
이번엔 해공 신익희 가옥을 탐방한다.
해공이 1954. 8부터--1956. 5 까지 1년 9개원간 살던 집이다.
당시 국회의장이던때 사들인 집이니 부근에서는 좋은 집이었을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해공 기념사업회에서 이가옥을 사들였고,
2005년 서울특별시 기념물 23호로 지정되어 보수하고, 소장품 등 전시물을 배치 하였다.
해공은 고종31년 1894년 판서를 지낸 신단의 다섯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한성관립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여 1913년 와세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후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1919년 만세사건이 있은후 1919년 3월 상해로 떠나 26년간 망명생활을 한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기초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초내 내무차관,
내무, 법무, 문교, 외무부장과 의정원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해방후 그해 12월 귀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를 구성하여 부회장을 역임하고
미군정하에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지냈다.
이무렵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을 하였으며, 자유신문사를 설립하여 사장을 하였다.
1947년 대한민국당을 결성하여 대표가 되었고, 그해 입법위원회 의장이 되어 헌법과 법률 제정에 기여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시 제헌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의 대통령 당선으로 해공이 국회의장이 된다.
1950년에는 한국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이 된다.
이어 1950년 제2대, 1954년 제3대 국회의장을 역임하면서 국민의 신망을 얻어 1956년 대통령에 출마한다.
1956년 5. 2일 한강백사장 유세는 정치사에 유명한 장면을 남겼고,
3일뒤 5월5일 전주로 유세차 이동중에 기차속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63세다.
그해 5월23일 국민장으로 장례를 하고 우이동에 안장하였다.
생가 모습.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는 해공의 생가가 있고,
진입로도 해공로로 명명하였으며, 유적지로 잘 보존 관리하고 있다.
동상과 해공로 표식. 진입로주변에 돌담을 정비하고 업적과 사진을 잘 정리해 놓았다.
판서를 지낸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이 안채 사랑채 대문 우물, 담장 등 잘 보존되어 있다. .
1867년 최초 지었는데 대홍수로 잠기어 옮겨서 1925년경 새로 지어진 집으로 기록에 전한다.
안내 간판이 있고 대문과 담장이 양반가의 품위를 보여주고있다.
뒷편으로 해공의 어록들이 석물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서는 해공이 광주시 출신임을 자랑으로 여겨서
남한산성 중앙공원에도 동상과 기념탑을 세웠다.
다음은 이곳지명 유래이기도 한 세종대왕 나신곳을 탐방 하였다.
이 표지석을 지나쳐서 저 앞쪽에 가있는 일행들이 보이는가?
이렇듯 지역을 알고 찾아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표지석은 작고 볼품없게 만들어져 있어 실망이다.
단정한 한옥 벽의 자태.
이번에 찾은곳은 추사 김정희선생 집터이다.
김정희 집터와 백송터는 같은 이웃 이었나 보다.
백송은 솔잎이 세갈래이다. 리키타 소나무도 세갈래.
소나무는 솔잎이 두갈래이고 .잣나무는 다섯갈래이니 - - - . 백송이 우리 고유종 신토불이 맞는가?
백송이 쓰러진뒤 잘라서 분석해보니 백송은 1690년경부터 자란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도 300살이다.
백송이 쓰러진뒤 노태우 대통령시절 그루통을 살리려고 온갖노력을 다했으나 2년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사망 판정을 내리고 잘라 버렸단다.
어린 후계 백송 4그루는 임자가 달리 있었다.
문화재청 1그루, 서울시 1그루, 종로구 1그루, 홍기옥 할머니 1그루,---
홍기옥 할머니는 이웃에 살면서 백송을 돌보았었는데, 다른곳에 이사갔다가 백송이 그리워 다시 돌아 왔단다.
어차피 공간으로 보아 하나를 실하게 키워야지 4그루가 자랄 공간은 안되는데 - - -.
이번에는 문화탐방중 한국고전무용 한국춤이다.
사단법인 한국 전통춤 연구회와 임이조 춤 보존회를 탐방하여 춤에대한 상식을 확장했다.
임이조춤 보존회장 수제자 권영심의 입춤 시범이다. 그는 임이조의 처제라고 - - - .
임이조는 1950년생의 남자 춤 명인인데, 2013년 11월 미국공연을 마치고 귀국후 폐렴으로 급사하였다.
숙연하게 감상들 하고 있네요.
통의동 보안여관
이곳 보안 여관은 1942년 문을열어 수많은 문인들이 묵으며 토론하고 작품을 구상하던 그런 곳이다.
서정주는 이곳에 하숙하면서 문학동인지를 만들었고,
김동리 김장환 오달주 등 소설가/시인이 묵었던 70년된 여관이란다.
2004년 재개발 계획으로 여관은 폐업하였고
2007년 전시전문업체가 인수하여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막걸리 한잔 하러 갈 시간이다.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에서 좋은 집을 물색해 본다.
조개탕에 녹두부침개 해서 시원한 막걸리로 마무리를 하다. 끝....